수필

차 한잔 마시다 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 보세요
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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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삶은 항상 기계적인 반복의 형상이다.
어쩌면 그 나름대로의 리드미컬한 몸짓을 가진 행위일런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여야 할 내가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무지함의 결과가 결국 이렇게 진저리쳐지는 나태함을 잉태하고 만 것인지도.
이런 내게 요즘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그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인내심이나 노력 따위가 아니라 그 언어를 극복하고 일어서야 할 강력한 T.P (turning point)라 결론짓는다.
문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T.P의 잣대를 무엇으로 설정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도달한 결론.....
'나누기' 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의 무엇인가를 나누어준다는 것 -그것이 사물이 됐든 감정이 됐든 -에 대해 인색해진다. 이런 'share of ~' 란 문구 자체에 대한 거부반응.
이는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편협하고도 엄중한 개념의 폐쇄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나누기' 란 행위를 통해 치유할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컬한 운명을 가진다.

인간의 이기성에 기초하여 볼 때 물질적인 나눔에 비해 정신적 나눔은 그 실천의 정도가 훨씬 용이- 물론 정신적인 나눔이 훨씬 더 어려운 이들도 존재한다. 다만 나의 기준에서 정 조준 했을 때의 얘기이다 -하며, 이는 현대를 살아 가는 인간으로서 고유의 당위성을 가지는 여러 가지 제약에서 벗어나 그나마 너그러운(?) 관용을 베풀 수 있게하는 구실이 되어준다.
하지만, 사랑이란 이름으로 구체화되어지는 너그러운 관용의 일련적 행위- 인간에 대한, 사물에 대한, 자연에 대한, 무형의 또는 유형의 존재에 대한.. -는 지극히 제한적이면서도 무한하고, 완벽하리만치 치밀하고도 과장된 포장이다.

어쩌면, 내가 나의 T.P의 구체화된 형상으로써 '나누기'를 택한 것은, 내 삶에서 결핍되어진 것에 대한 반발심에서 기인한것인지도 모른다.
탐욕스럽게 갈구하는 어떤 것을 앞에 두고 짐짓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무심한 얼굴로 그것을 대할 때처럼, 나는 나의 그칠 줄 모르는 이기적인 탐심에서 그렇게 무심한 척 유세를 떨어 대며 내 삶을 현재의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되돌려 줄 강력한 무엇이 바로 '나누기'라 말하는 오!~ 이 뻔뻔함이란....

변명은 변명 이외의 이름을 가질 수 없다.
결국, 항상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형상이라 푸념하는 삶은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나의 어설픈 변명에 불과하며 이것의 형상화된 행위가 T.P의 설정이란 형태로 나타났을 뿐.
정작 내게 필요한 것은 T.P가 아니라 삶의 언어를 이해해야만 하는 '나'이외의 어느것도 아니라는걸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의 나약함을 뒤에 숨길 방패 찾기에 여념이 없다.

삶안에서 나의 육신과 정신이 맞물려 말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일.
이것이 내가 삶을 영위해가야만 될 진정한 이유이자 목적일진대, 나는 여전히 나를 나 이전으로 되돌려줄 강력한 T.P 의 존재를 지우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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