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세요
수박 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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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박 서 리

햇님이 화가 난 일이 있었는지 붉은 얼굴로 산과 들을 온통 뜨겁게 데우고 있는 여름 한나절.
너무 더워서인지 논 가장자리에서부터 훠얼 밀려오는 초록바람도 숨어버리고 당산나무 아래 하루 종일 매앰매앰 찌르르르 울던 매미, 여치도 낮잠자러 가버린 어느 더운 여름날이었어요.
- 오메! 더워 오메 더워! -
학교 갔다 돌아오는 준이와 누나 선이는 한손으론 손차양 하고 한손으론 열심히 손부채질 하며 어디 잠깐 쉬었다 갈 그늘을 찾고 있었습니다.
- 준아! 저그 수박 밭 원두막서 쬐끔만 쉬웠다 가자 잉! -
오늘 같이 더운 날은 동네 어귀의 수박 밭 원두막에 누워 한숨 자고 가면 딱 좋을텐데.... 그러나 선이와 준이는 원두막에 앉아 보았지만 나뭇잎들도 숨을 죽이는 바람 한점 없는 오늘 같은 날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넓은 수박밭에 아이 얼굴만한 수박이 덩굴 덩굴 보이자 준이는 갑자기 목이 말라왔습니다.
- 누나야! 수박 묵고 싶지야? -
- 더운께로 묵고는 싶지만 수박이 어딨다냐? -
- 아따! 누나야! 쩌그 수박 많은께로 우리가 한나 묵어도 암시랑 않당께 -
- 음메! 그믄 안된다이. 글다가 주인한테 들키면 으짤라고야? -
준이는 냅다 뛰어 가 통통한 수박 하나를 골라 왔습니다.
주먹만한 뾰족한 돌을 골라 오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준이가 수박을 반으로 깨트리자 분홍빛 맑은 수박물이 선이 얼굴로 달콤하게 튀었습니다.
- 오메! 겁나 맛나겄시야... 어쩌까이! 우리 얼릉 묵고 가자잉! -
선이와 준이는 절반의 수박 한덩이씩을 들고서 조그만 얼굴을 파묻고 그 달콤하고 시원한 맛에 푸욱 빠져 정신없이 먹었답니다.
논 둑에서부터 건너편 개울 다리쪽으로 장난꾸러기 바람 한점이 휘잉 스치듯 지나 갔습니다.
선이와 준이는 다 먹고 난 후 껍데기를 신작로 풀섶에 숨기고 손등으로 입을 한번 쓰윽 닦고 선 의기양양하게 집에 돌아 왔습니다.
선이와 준이는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랬을 겁니다.
사실, 준이는 먹고 싶은 맘보다는 몰래 먹는 재미가 더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하루는 마을 조무래기들을 다 몰고 와 수박서리 찬치를 실컷 벌이는 날도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 온 준이는 무거운 책가방을 토방에 툭 내려 놓고 - 엄마! - 하고 부르려는데 순간 삼밭에서 상추를 거두시는 엄마와 영철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 준이 엄마! 준이 고놈이 부잡한 짓을 허긴 해도 노나 먹을 줄 아는 거 본께 철이 많이 들었어 잉? -
- 먼 소리래여? -
- 아따! 우리 영철이가 그란디 학교 파하고 집에 갈 때 꼭 집이 수박 밭에 들러 친구들 하고 수박 한덩이씩 노나 먹고 간다드만... -
- 음메! 머라고라? 그랑께 몇일째 수박 밭에 수박 껍질이 나브라져 있었던 것이 우리 준이 짓이었단 말이여?
내 이눔의 자식을 그냥! -
이 말을 듣는 순간 준이 어깨 위로 와르르 쏟아지는 한줄기 햇살이 더는 환하게 더는 따뜻하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 오메! 우리 집 수박밭인줄은 진짜 몰랐는디 오메 난 어쩔까이 -
도망갈까 하고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나즈막히 들려오는 아버지의 다정한 음성이 준이의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 아따! 우리 준이가 묵은 거고, 혼자 안묵고 친구들이랑 착하게 노나 먹었단디 그리 야단 칠 일도 아니그만 그라네 -
그 순간 준이는 마당 끝 담장 아래 피어 있는 한떨기 양귀비 꽃처럼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붉은 마음은 어른이 되면서 점점 초록빛으로 물들어 이젠 지울 수 없는 초록빛 추억이 되었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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